총회를 마치고 어질어질한 정신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리가 서로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참으로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 역시 나누어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름 글을 솔직하게 쓴다고 썼는데 그것이 또 애매하게 들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해 보았고,
('교사들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모르겠다'는 변함없는 성토 주제이지요.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
어쩌면 우리가 "교육"이란 이름을 두고 서로 원하는 것이 다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보면 사람에 대해 오해를 가지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원하는 교육이 무언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리 갑작스레 글을 적습니다.
일단 사람들이 '교육'이라는 것에(사실은 학자들조차도 그 물음에 별 관심이 없는 주제에)
이렇게 관심이 많다는 것, 열의가 있다는 것은 제게는 꽤 긍정적으로 비춰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긍정적인 이유는 '교육'이라는 소재를 통해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기도 해서이고
부정적인 이유는 그만큼 교육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 개념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슬슬 제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아마 제가 순진하거나, 아니면 멍청하거나 그 중 하나 일거란 생각은 이전부터 했지마는
전 이전부터 사람들의 속내와 겉말을 잘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승규야, 가까운 시일 내에 술이나 한잔 하자, 연락할께 "하면
정말 그 사람이 언제 연락하나 기다리다 먼저 전화를 걸기도 할 정도였죠.
막상 전화를 걸어 "한 잔 하자며?"라고 따지듯 물으면,
농담을, 그 맥락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나의 잘못으로 귀결되곤 했지요.
이러한 삶의 습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잘 다니지 않은 제도 교육을 겨우겨우 졸업하고,
선생을 기른다(뽑는다가 아닌...)는 대학에서도,
다시 선생이 되어서도 똑같았지요.
삶의 흔적이 그러해서인지
교대에 다닐때도, 교사가 되어서도,
교사가 되어 조합에 들어가서도 비슷했지요.
노래, 많이 불렀지요.
"어릴 적 내 꿈은 좋은 선생님 되는 거였어. 흙냄새 가득한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서..."
단순했나요?
임용고사를 어디 봐도 다 붙는 그 당시 상황에서
내가 뱉어낸 이야기들을, 내가 부른 노래들이 헛되이 부른 노래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서울, 경기로 지원 내신을 낼 때,
강원이냐, 경남이냐를 두고 고민을 했지요.
동기들도, 교수들도 제 행동을 두고 웃기는 놈, 혹은 별종 정도로 생각했지요.
그렇게 시골에서 아이들과 살다보니 참 아닌 것도 많더군요.
적어도 제가 가장 큰 모순을 느낀 것은 선생님이었습니다.
(물론 전 아직도 많은 수의 선생님들이 그러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시골 아이들을 살리는 작은 학교를 만드는 운동을 할 때에도,
전교조 의령지회 초등위원장(작은 지역이라 초등지회가 따로 없었지요)을 할 때에도,
아니 여러 운동을 할 때에도 전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무엇이 되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거다.
시장 좌판에서 아이가 나물 한 움큼 팔더라도
공장에서 땀흘려 열심히 일하며 살 지라도
바르고 옳게, 떳떳하게 살면 그게 제대로 사는 것이다.
이런 말들, 이런 글들, 이런 노래들.
전 정말 믿어왔었습니다.
(젠장, 아직도 믿고 있네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만은 않더군요.
그런 모순된 현실에 괴로워 이야기를 해 봐야
"넌 결혼을 안해서 잘 몰라"
결혼을 한 후엔
"아직 아이가 없어서 몰라, 아이를 낳으면 달라지더라"라는 무수한 말들 속에서
저의 생각은 깎이고 부서져 버렸지요.
그 현실적 모순에서 이건 아니다 싶어 학교를 박차고 나왔던 것이 벌써 4년 전이네요.
그 과정에서 너무 힘들었지요.
저도 머리로는, 말로는 그것이 옳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삶에서 그것을 - 내가 누리고 있는 현실을 버리고 다른 선택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 현실이 대부분 물질적인 현실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폴 발레리인가, 그 사람이 그랬잖아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고...
마침 그 때 읽던 책도 소크라테스의 "변명"이었고요.
그렇게 학교를 그만두고는 공부를 계속 하려다가
아이들이 그리워 고양자유학교를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곳에서는 아이들과, 또 부모님들과 함께 이렇게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이곳으로 와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또 대학원에서도 쉽게 공부할 수 있고 논문도 빨리 뽑아낼 수 있는 교육심리나 방법보다는
철학을 어떻게 실현할까 하는 교육과정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도,
그리고 쉽게 논문 쓰겠다는 유혹을 거부하고 긴 시간 '학교중심 교육과정'에 대해 공부하며 써 내려간것도...
글이 너무 멀리 와 버렸네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그것이 내 모습인걸.... --;;
이어가자면
전 아직도 교육에 대한 저의 생각은,
교육 받은 인간상에 대한 생각은 변함 없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무엇이 되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거다.
시장 좌판에서 아이가 나물 한 움큼 팔더라도
공장에서 땀흘려 열심히 일하며 살 지라도
바르고 옳게, 떳떳하게 살면 그게 제대로 사는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이들이 열심히 살면서 훌륭한 학자가 되고,
사회적 기업가가 되고, 또 세상을 바꾸는 혁명가가 되는 것도 꿈꿉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삶의 끝이, 교육의 끝이 아니라
삶의 시작, 교육의 시작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서 결국 어떻게 살거냐가 중요한 거고,
또 그래야만 세상이, 사회가, 공동체가, 우리가, 그리고 내가 변하고
그렇게 변해야 내가, 우리가, 공동체가, 사회가, 세상이 아름다워 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어서 이야기 하자면
교육의 목적은 외적인 목적이 아니라 내적인 목적에 맞추어 져야 합니다.
교육의 목적이 교육 외부로 두게 되면 교육은 무엇(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수단적 가치를 좆게 됩니다.
교육의 목적이 교육 내부로 두게 될 때, 교육은 자신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닦아 나가는 것에 집중할 수 있지요.
그것이 교육의 목적이니까요.
진로모임, 진학에 관하여, 또 아이들의 직업교육까지
이제는 교육에서 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교육의 목적은 아닙니다.
교육은 아이가 바른 인간으로서 길러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바른 인간으로 크는 가운데 필요한 것이 무엇(교과)이며
그런 인간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교과를 구성하고(교육과정개발) 가르쳐야 하는지(방법) 꼼꼼히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곳 대안학교는 그런 사람을 길러내는 곳이어야 합니다 .
물론
학생도, 학부모도, 또 교사도 그러면서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의 공부는 일반적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공부겠지요.
또 그 결과로 좋은 직업, 좋은 직장을 얻었으면 합니다.
인지상정이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교육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수적 결과이지
그것이 교육의 목적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고
모든 길을 다 닦아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의 방도가 그렇게 어렵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서 지켜봐야 하는 것이,
교사와 부모의 역할이 아닌가 합니다.
어떤 새도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둥지에서 떠나 보내지 않습니다.
그 적절한 시기는 어디일까요?
김희동 선생이 자주 드는 예처럼
자장면집 가서 칼국수 달라고 하면 그거 만들어 내지 못하지는 않겠지요.
있는 면에 우동 국물 말아내면 그것이 칼국수와 비슷하니까요.
하지만 자장면 집은 자장면을 하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대안학교의 철학은 아이의 인성을 잡고 다른 식으로 학력을 올리는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본디 목적인 인간을 인간답게 키우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학력을 키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요.
또 모든 사람들이 다 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 학자라면 누가 나물팔고 누가 공장에서 기계를 돌릴까요?
누가 농사를 짓고, 누가 건설현장에서 돌을 나를까요?
하지만 그런 사람을 키우는 것조차 교육의 목적은 아니지요.
말씀드렸듯 내적인 목적을 가지고 교육을 방향을 잡아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속에서
단지 자기 삶에서 주어진 일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을 넘어서 깨어있는 것.
그 깨어있는 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옳게, 그리고 꿋꿋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교육이 가야 할 길이 아닌가 합니다.
산문시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곤가 불리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하지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비슷할까요?
탄광 광부의 뒷주머니에 꽂혀있는 하이데거의 책은
교육의 목적이 아닌 결과로 이루어져야 하는 거지요.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인문학도 사실 이러한 정신을 갖게 하기 위한 것들이 아니었나 합니다.
얼마전 한겨레에도 비슷한 글을 김규항씨가 실었었지요.
인문정신의 적
(김규항)
요 몇 년 새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요약하면, 돈이 사람들의 정신을 장악하면서 ‘돈 안 되는’ 학문인 인문학이 괄시받고 있다는 것일 게다. 사실 이제 누구도 대학에서 철학이나 문학을 공부하겠다는 아이를 곱게 바라보진 않는다. 하여튼 그런 위기론 속에 ‘비제도’ 영역에선 인문학 공부가 나름의 붐을 이루고 있다. 여기저기서 인문학 강좌가 열리고 나 역시 그런 데 불려가는 일이 전보다 잦다. 사람들은 그러저런 강좌를 꾸리고 참여하면서 자신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 만족감을 얻는 것도 같다.
요즘 같은 세상에 돈 아닌 다른 걸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귀한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런 귀한 노력들 속에서도 정작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리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가장 간명하게 정의한다면 인문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공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인문학을 여느 학문과 다르게 여기는 것도, 그 위기를 개탄하는 이유도 인문학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인문학 공부는 인문학 책을 읽는 일, 인문학적 개념과 지식들을 습득하는 일만은 아니다. 물론 책을 읽고 개념과 지식을 습득하는 일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중요한 방법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문학 공부의 요체는 끊임없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삶에 있다. 인문학 책을 여러 권 썼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엔 영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고 인문학적 지식은 보잘 것 없지만 언제나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답게 산다는 것 무엇인가’로 이어진다.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등 인간의 삶과 관련한 모든 부문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그 질문들은 다시 잔가지를 뻗어나간다. 이를테면 ‘교육이란 무엇인가?’는 아이는 왜 공부를 하는가 학교는 무엇인가 국어 공부는 무엇인가 수학은 왜 공부하는가 등으로 이어진다. 그 질문들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것, 다시 말해서 내 삶에 실천하는 것을 인문정신이라 한다. 진정한 인문학 공부는 인문정신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시작된다.
인문정신은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하며 완전히 해방된 삶을 살게 한다. 그러나 인문정신은 갖는 일은 인문학 책을 읽거나 말이나 글에 난해한 인문학적 개념어를 섞는 일처럼 만만하진 않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적어도 사회적 차원에선 넘쳐나 보인다. ‘진보 교육감’이니 ‘시장주의 교육의 폐해’니 하는 말들도 그 질문과 관련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실제 삶에서, 말하자면 아이 교육에서 교육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에 따른 잔가지 질문들을 하고 정직하게 실천하는 사람은 참 드물다. 인문학의 위기를 개탄하고 인문학의 부흥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썩 다르진 않다. 그들은 단지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현실이...”
도저한 인문학적 지식과 여러 진지하고 소중한 인문학적 노력들이 그 한마디로 연기처럼 날아간다. 인문정신의 적은 과연 누구일까? 돈이 삶의 전부라고 돈이 행복의 지표라고 끝없이 주입하는 자본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자본이 인문정신의 적이라 말하려면, 우리는 적어도 “그래도 현실이...” 따위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 그 말의 정확한 의미는 ‘자본 권력에 굴종해야지 어쩌겠어’라는 말, 인문정신의 적에 대한 추레한 투항 선언이기 때문이다. (한겨레)
쿨럭대며 뱉어낸 저의 이야기가 혹 귀에 거슬리진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안 살어?" 혹은 "내 이야기가 맞잖아" 하며 공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소통을 하려면,
이야기 거리도 필요하고 관점과 방향성도 필요하지만
일단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니까요.
그래야만 자신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이야기하고 서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직 서른 중반의 어린 나이인지라
조금은 과격하고, 조금은 직설적인 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뭐, 이 글이 다른 곳에 실릴 글이라면
몇 번을 보고 다시 고치면서 부드럽게 바꿨겠지만
가끔은 투박하고 거친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글을 올립니다.
제 생각이 무조건 맞은 것은 아니니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야기거리인
"교육과정"과 "아이"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전에 학부모 교육 때 썼던 글을 첨부합니다.
그때도 교육의 목적을 밝혔다고 생각했는데 모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시 첨부합니다.
교사 개인으로서의 '오늘'이 생각하는 교육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
학교 교육과 사교육을 넘어서
(오늘)
1.
학교교육과 사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이야기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교육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 때문에 교육을 하는가에 대한, 교육의 목적에 대한 내용일 것이다. 이 땅의 인구가 5천만이라면 아마도 교육전문가 역시 그 정도 인구가 될 것이고, 그 수만큼이나 많게 교육에 대한 정의가 내려질 것이다. 물론 그 만큼의 교육에 대한 목적도 다양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교육이 무엇이고 어떤 인간을 키우겠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그 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일단 수많은 교육의 목적을 가만히 살펴 보면, 아마도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지 않을까 한다. 그 목적이 교육행위 내부에 있는가, 아니면 바깥에 있는가가 그것이다.
교육의 목적이 외부에 있다 함은 교육을 통해서 무엇(어떤 사람)이 되겠다거나, 권력이나 돈을 벌겠다는 식의, 교육의 수단적 가치가 우선시 된다. 교육의 목적이 교육 내부에서 찾는다기보다는 외부에서 찾는 것이다. 사실 교육이 아닌 어떤 것들도 그 목적을 외부에서 찾는다는 것은 그것 자체의 순수함을 잃게 만든다. 내가 사는 이유가 내 자신의 목적이나 시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기대를 위해 사는 삶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피폐하게 하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적어도 바른 교육을 위하여 고민해 온 사람이라면 교육이 어떤 외재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거부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교육에서 가장 경계하는 ‘내 아이만을 위한 교육’과 그 지점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육의 목적을 내재적으로 본다는 것, 곧 교육이 그 자체로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교육의 목적은 자신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교육받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이 끝(end)이 있는, 그 목적(end)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방향성을 향해 달려가는 행위(aim)가 교육의 목적이라 생각한다. 이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반성하고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는 말이다.
2.
교육이라는 것은 아이라는 하나의 씨앗을 잘 키워내는 과정을 일컫는다 할 수 있겠다.
만약 씨앗을 키우는 목적이 꽃을 보겠다던가, 그것을 팔아 이득을 얻겠다는 것은 외재적 목적에 속할 것이다. 혹자는 왜 그것이 잘못되었는가 하고 반문할 지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고, 또 어느 누군가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심미적 욕구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생계를 위한다는 외재적 목적에 방점을 찍을 경우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 주변을 돌아보면 먹을거리던 입을거리던 ‘생계’라는 이유로 할 짓, 못할 짓 많이 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 아닌가? 그 사람이 처음부터 그렇게 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아름다운 꽃을 보겠다는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서 꽃 이외에는 다른 과정들은 단지 꽃을 피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또 그런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인위적인 행동을 많이 하게 되는가? 화려하고 진한 색채와 향의 꽃에서 자극적 재미를 맛 본 사람이 초록 단색의 작은 싹이 틔워지는 모습에서 강한 생명의 잔잔한 아름다움이 느낀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뿐만아니라 교육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이고 과정이기 때문에 아이를 잘 키워 뿌듯하게 바라보겠다는 관점은 주체와 객체의 뒤바뀜이며 그것이야 말로 권위적인 교육이 된다. 또한 아이를 세상에서 잘 팔리는, 물직적 값어치가 있는 인간으로 키우겠다는 자본주의적 발상을 가지신 분은 여기에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아마 그것들도 처음부터 나쁘다기 보다는 잘못된 목표 설정이 우리의 삶을 그렇게 끌어간 것은 아닐까 한다. 그만큼 목표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게하는지 반성해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3.
그럼 과연 교육은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 씨앗을 키우고 기른느 목적이 심미적 욕구를 위해서도 아니요, 내다 팔기 위한 상품적 가치도 아니라면, 우리는 어디서 그 목적을 찾아야 할까?
교육(敎育)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가르치고 기르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또 실제 상황에서도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난 아이를 민주적으로 키우기 위해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고 들어주며 살거야”라고 말하는 어른이 있다고 해도, 그 교육관 역시 그렇게 가르치겠다는, 그렇게 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니, 그것 역시 가르치고 기르는 것이라는 목적지향적 행위이며, 아동중심, 아동존중이란 말을 할지라도 그것 역시도 가르침이 중심이 되는, 어른들의 계획된 선한 의도, 선한 의지일 뿐이다. 따라서 교육에서 계획은 없다해도 있을 수 밖에 없으며, 가르치는 자(넓은 의미에서의 교사)의 영향력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을 하는 중요한 주체가 ‘아이’가 아닌 어른이듯, 교육을 받는 주체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아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자유롭게 혹은 그와는 반대로 키운다고 어른들이 이야기하더라도 어쩌면 그 어느 것도 진정으로 아동을 존중하여 키우는 것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교육이란 원래 어른이 가르치고 기르는 것이니 어른이 생각한 바에 따라서 키우면 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그럼 우리는 어떤 목적을 향해 씨앗을 심고 커 나가도록 도움을 주어야 할까? 어떻게 키우는 것이 그 씨앗을 잘 키우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씨앗의 본성을 잘 이해하고 지켜봐가면서 스스로 가진 그 내적인 빛깔을 꽃피워 나가는 것이 교육이 아닐까 한다. 곧 언제 꽃이 피는지, 또 물은 얼마큼 주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의 날씨에서 잘 크는지 등 그 씨앗이 가진 특성들을 잘 이해해야만 교육의 본래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씨앗마다 가지고 난 특성이 다 다르고 게다가 우리가 가진 씨앗의 종류도 다 다르다는 점에서 교육의 난점이 생긴다. 따라서 그 종류에 따라 심는 토양도 다를 것이고 그 특성에 따라 물과 영양을 공급하는 것도 다를 것이다. 단단한 돌틈속에서 인위적으로 물 한번 주지 않아도 꾿꾿이 피어나는 민들레 씨앗도 있을 것이고, 끊임없이 보호해주고 관심이 필요한 화초도 있을 것이다. 그 특성들마다 가지고 태어난 본연의 모습을 잘 꽃피워주는 것이 그 씨앗이 이 세상에 온 선한 목적이 아닐까?
그러나 학교 교육의 상황이 되면 교육의 상황보다 조금 더 어려워진다. 서로 종류도 다른 씨앗들을 모여있는 상황이고, 같은 종류의 씨앗이라도 그 모양과 특성이 다를 진데 그것들을 하나의 토양에 집어넣고 똑같은 조건 속에서, 하필이면 “누가 누가 더 잘하나” 시합까지 붙여놓고는 키우고 있다. 아니 요즘은 그보다 한 술 더 떠서 모든 식물들에 대해 수량화, 계측화(일제고사) 하여 성장조건의 평균치를 구하고 ‘모든 식물은 잘 자라야 한다’는 미명하에 여러 가지 처치를 한다. 그런 환경속에서 꽃은 일찍 필지 몰라도 그만큼 일찍 지게 될 것이고, 식물은 쑥쑥 크게 자라는 듯 해도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고 웃자라, 조금만 비바람이 쳐도 금세 뿌리 뽑혀 제 생을 제대로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마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과정속에서 어떻게 각자 종류도 모양도 다른 씨앗이, 또 같은 씨앗이라도 피어나는 모양새부터 지는 그 순간까지 전혀 같을 수 없는 그 하나의 생명들이 자신의 가진 바를 피우고 뿌리고 갈 수 있을까?
그렇지만 ‘입시’나 ‘출세’라는 교육의 외재적 목적을 벗어나 바른 교육을 해보자고 고민해 온 우리들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이곳 역시도 각 개인에 대해 맞추어지는 교육이라는 것은 실제로 어려운 일이다. 뿐만 아니라 아직 아이들 각자의 씨앗에 대한 근본적인 특성에 대해 아는 바가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물론 그 특성은 책을 통한 이론에서도, 또 이전의 실천을 통한 경험에서도 도움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 역시도 하나의 ‘보편’일 뿐 어느 개별 아이, 개별 사례에나 통용되는 ‘특수’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금 더 맞는 토양에서라도 아이가 좀 더 잘 자라기 위해 비료를 뿌리는 일 역시도 주의해야 할 일이다. 특히 그것이 독성을 가진 화학비료일 경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진짜 중요한 일은 교사와 부모 양자가 아이를 주의 깊게 관찰해서 단지 지금 눈 앞의 일시적인 성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긴 호흡, 긴 안목을 가지고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이야기 나눠야 할 것이다. 그런 관찰과 토의의 과정에서 지금 꼭 필요한 것이되 학교에서 해 주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비료를, 토양이 맞지 않는 다면 옮겨심기를, 거친 고난과 불굴의 의지라면 역경을, 따뜻하면 온기와 보호라면 온실로 옮겨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덧붙여 내가 내 삶의 무엇인가를 피워내는 중이라 그래서 아이들의 삶을 챙겨 볼 여유가 없다면 어쩔 수 없으니 나쁘지 않은 토양과 안정되듯 보이는 온도(교육이 아닌 보육의 개념) 속에 맡기기 보다는 그 속에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함께 모색해 보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
공교육, 사교육, 이 교육, 저 교육의 관점을 넘어서 참된 교육을 고민하고, 참된 삶이 무언가 생각하는 가운데 나의, 아이의, 우리의 삶을 바라본다면, 내 안의 불안도, 내 속의 불만과 그에 의해 생성되는 욕구도 좀 편안해지지 않을까 한다.
이 이야기가 '나(오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교육과정을 확대하겠다'라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교육이 무엇이고, 그 교육에 대한 지향을 실현하는 교육과정(내용과 방법)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씁니다. 꼼꼼히 읽고 이야기 나누었으면 합니다.